| '붉은몫소리'는 몫 없는 사람들과 함께 목소리 내기를 실천하며 여성해방과 노동해방을 꿈꿉니다. 앞으로 ‘여성노동의제’ 기획연재와 에세이로 만나 뵙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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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한 모자(母子)보다 우선해야 할 가치는 여성 개인이 몸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택한 방식으로 살 수 있는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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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만 되면 애 낳으라고 난리다. 기억엔 2003년부터인 거 같다. 2002년 한국이 1.17 세계 최저출산율을 기록한 후부터 연례행사처럼 반복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제는 일상적 ‘출산파업’을 제압할 수 있는 획기적 ‘출산이데올로기’가 연중행사로 고안되고 있는 지경이다. 하다하다 ‘고령출산’이 기형아를 낳는다며 나이 든 여성을 탓한다. 하지만 고령출산 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성적파트너 또한 대개 고령남성일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정부의 자가당착이다.
올해는 프로라이프의사회가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한 일명 ‘낙태의사’를 고발하기에 이르러 낙태에 대한 본격적인 선전포고를 시작했다. ‘낙태근절운동’은 처음에 대한산부인과의사회의 자정운동마냥 시작되더니 이젠 프로라이프의사회가 정부의 역할을 대신해 ‘법의 힘’을 앞세우고 있다. 출산장려금 5배 증액, 두 자녀 이상 가정 학비보조금 월 50만원 이상 지급 등 ‘낙태근절을 위한 5대과제’까지 제시하며 더욱 공세적으로 나오고 있다. 헌데 프로라이프의사회가 이렇게까지 요란을 떨 수 있는 건 짐작하듯 정부의 비호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보기에 자신들이 할 일을 솔선수범 해나가는 프로라이프의사회는 ‘저출산정책의 봉’이라 하기에 제격이다.
때마침 ‘생명의 신비상’을 받기 위해 미국 하원의원인 크리스토퍼 스미스라는 사람까지 내한해 생명과 인권 운운하는 걸 보면 낙태근절운동은 소신 있는(?) 의사와 생명수호운동을 벌이고 있는 종교계, 그리고 이번만큼은 ‘낙태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정부의 합작품인 셈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재생산 권리와 통제권은 온전히 여성 자신에게 주어져야 한다. 누가 간섭할 영역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산아제한, 출산장려와 낙태금지는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를 포함해 어느 국가에나 공통적으로 작동되었던 여성 신체에 대한 강력한 통제 정책이었다.
그런데 이 정책의 생성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여성 신체에 대한 통제 정책이 만들어진 이유는 여성의 출산이 노동력/국민의 안정적 수급이라는 사회적 재생산의 책임과 직접적으로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국민국가/기업국가 유지의 기본 요소인 인구재생산은 재생산 책임을 전적으로 여성에게 지우는 것으로 해결된다. 재생산의 키(key)를 쥐고 있는 여성들을 주체적인 시민(市民)이 아닌 모성적 신민(臣民)으로 만들어 국가 차원의 재생산 위기를 관리하는 방법이다. 그렇기에 여성을 모성의 신화적 존재로 떠받들다가도 출산의 역할을 거부하는 여성들을 마녀 사냥하는 형태로 마구잡이 칼날을 휘두르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최저출산율 기록을 갱신할 때부터 낙태 문제의 사회화는 예견된 것이다. 과연 이들이 걱정하는 게 기/비혼모의 건강과 삶의 질일까? 이들이 지키려고 하는 게 태아(胎兒)라는 이름의 인권일까? 여성 개인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의 몸을 자기 통제권 하에 두겠다는 것이 대체 왜 문제인가?
건강한 모자(母子)보다 우선해야 할 가치는 여성 개인이 몸의 주인으로서 자기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택하면서 온전히 자기 권리를 실현하면서 살아나가는 것이다. 여성 주체의 삶의 잣대를 합법과 불법으로 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벌써부터 지방 원정낙태와 조산원의 때 아닌 각광, 수백을 호가하는 수술비용 등으로 낙태 단속의 역효과는 속출하고 있다. 낙태를 불법으로 규제하면 할수록 크리스티안 문쥬의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서처럼 목숨을 걸고 인공임신중절수술을 감행할 여성들이 넘쳐날 것이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한 원하지 않는 출산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낙태밖에 없다면 여성들에게는 달리 방도가 없다. 단속과 고발, 불법이라는 낙인 때문에 여성 스스로 몸의 권리를 포기하게 될 때 여성 자신은 자기 스스로 주홍글씨를 몸 안에 새길 수밖에 없다. 내 몸, 나 자신 하나도 마음대로 못하는 자의 열패감과 트라우마 말이다. 박민규의 소설 <아침의 문>에서 낙태시기를 놓친 끝에 자포자기 상태로 빠져들다 핏덩어리를 쏟아내고는 황망히 사라지는 편의점 그녀처럼.
모성과 출산이 유래 없이 강조되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난, 죽을 때까지 여자로 산다>는 제목의 신간은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엄마가 아니라 ‘여자’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는 이미 여러분이 감지하는 대로다. 무자녀 독일 기혼 여성들의 이야기. 결혼한 여성이 엄마 역할을 벗어 던지면 비정한 모성으로 치부되고, 성인이 되어도 결혼을 안 하면 사람대접 못 받는 게 당연시되는 이 땅에서 엄마가 아닌 여자로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지시어가 될 수 있다. “내 배의 주인은 나다!”, “재생산 권리를 보장하라!”, “재생산 정의를 실현하라!” 바로 지금 요구되는 낙태근절운동에 대한 여성들의 권리투쟁 목록이다.